공원

공원

     발밑에 가려진 것을 생각한다. 밟고 선 자리에 켜켜이 쌓였을, 쓰이지 않은 기록과 회고되지 않은 기억들에 대해. 푹신하면서 거친, 발과 맞닿은 이 표면의, 빛 한 줌 들지 않는 그 밑에서 웅크리고 있는 땅의 시간과 시선을 기대하지 않는 공간에 대해. 그리고 그런 자신을 드러내는 장소로써 땅의 겉살, 녹지이자 공원 혹은 초록색에 대해. 이 겉살로부터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지금의 땅이 도래하기 이전 ‘애초’의 땅과 그 땅의 색을 상상한다, 또 어떤 발에 밟혔으며 그것이 무엇의 발이었을지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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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있는 자리서 방을 휘 둘러본다. 모든 게 지극히 안정적이고 당연하고 문제없어 보인다. 이 풍경은 어제처럼 내일도 그 모습을 유지할 것이며, 그러한 예측에서 나는 무의식적 안정감을 느낀다. 안정감은 풍경에서 오고, 풍경은 사물로 이뤄진다. 언젠가 내가 이 ‘사물들’을 이해하고 있는가, 라는 의심이 들었다. 사물과 맺는 관계에 대한 나의 고찰이 얼마만큼의 두께일지 의문스러웠다. 단편적인 지식이 나를 이해의 차원으로 도달시켜주진 못 하는바, 매일같이 몸을 비비는 가구들과 손에서 놓을 줄 모르는 전자 기기를 비롯해 사물들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바는 영 볼품없는 것이었다. 그러자 안정적이란 느낌이 허깨비 같았고, 그런 기분에 젖어 있던 나 자신이 우매하게 여겨졌다. 익숙함이란 표현도 적절치 않다. 마취된 듯 몽롱한 느낌이라 하면 맞겠다. 나는 사물들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고자 제작 과정을 직접 겪어보기로 했다. 그 과정은 신체적이면 좋을 것 같았다. 내 몸을 움직일수록 사물이 형상을 갖춰간다면 그것은 어떤 동반적인 사건일 테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신체적 관계를 통해 사물을 그려볼 수 있으리. 내가 다룰 수 있을 법한 재료를 찾아 나는 목공을 시작했다. 하지만 고백건대 나는 나무의 물성에 어떠한 관심도 없었다. 목공은 내게 합리적인 추론을 거쳐 도달한 결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반면 목공 교육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무가따뜻하다고 했다. 사람들은 나무로부터 자연스럽고, 인공물에선 볼 수 없는 비범함을 느낀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동시에 나는 곧장 내 앞에 자리한 나무 책상을 어루만져봤다. 어느 정도 벗겨진 마감 칠의 흔한 부들부들함이 느껴졌고, 그곳엔 따뜻함이라기보단 내 체온이 남긴 미지근함이 있었다. 물론 나무를 가리켜 따뜻하다거나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표현이 이해 못 할 만한 것은 아니나,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사람들이 입을 모아 되풀이하는 나무의 긍정성을 들으니 어떤 도취감이 공간에 쌓이는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다른 교육생들에 비해 나무를 냉담히 바라봤고, 그로부터 일종의 배덕감과 거리감이 피어났다. 

     목공을 배워감에 따라 나무에 대한 나의 배덕감은 차츰 사그라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나무를 재료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시작 단계에 녹아있던 나무에 대한 경이로움은 목재에 대한 답답함으로 변해갔다. 현장에는 탄식과 짜증을 삭히는 소리가 퍼지고, 때때로 부상으로 인한 피가 바닥에 흘렀다. 목재는 생물이었던 것의 시체다. 그래서 살아있었을 때의 습성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목재는 주변 환경에 따라 덥고 습하면 늘어지고 춥고 건조하면 수축한다. 자란 지 오래된 부분은 단단하고 비교적 어린 부분은 반대로 무르다. 이 밖에도 목공은 목재가 가진 변수들을 읽어내고 그것에 반응하는 과정이 주를 이룬다. 이 과정이 녹록할 리 없거니와, 살아있던 것으로서 목재는 태연히 제작자의 통제를 벗어난다. 마치 삶이 통제될 수 없는 것처럼. 제작자는 설계대로 나무 구조물을 만들고 싶을 뿐인데, 목재는 빠르면 불과 하루 동안에도 몇 번이나 자기 몸을 뒤척거린다. 목재는 군말이 많다. 정확했던 치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오차를 뱉어낸다. 물론 제작자의 숙련도에 따라 통제 가능한 범위는 달라지지만 목재는 존재적으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다. 통제를 거부하는 부분은 기대 되지 않기에 짜증을 일으킬만한 것이었고, 미루어 짐작건대 적어도 그러한 부분은 자연스럽다거나 따뜻하다는 표현에 해당하지 않는 듯했다. 목공에서 재단 과정은 필수적이다. 재단 과정에서 물건의 사용 가치를 떨어트릴 목재는 탈락된다: 옹이는 때때로 큰 구멍을 가지고 매우 단단하며, 나뭇결이 엉켜있어 작업성이 좋지 않다. 벌레 먹힌 자리는 미관상 좋지 않고 구조적으로 견고함이 떨어진다. 썩은 부분은 조직이 연약하다. 곰팡이는 원치 않은 얼룩을 남긴다. 나무에 따라 송진이 지나치게 많으면 계속 묻어나온다 …. 물론 제작 단가를 절약하기 위해 이런 탈락들은 최소화로 이루어진다. 이를 기준으로 ‘하자’가 적은 목재는 상급으로 고가에, 반대의 경우엔 하급으로 저렴하게 거래된다. 나무가 보낸 삶의 측면에서, 어떤 삶의 흔적은 수용되며 어떤 삶의 흔적은 거부된다. 수용된 삶은 높은 사용 가치, 즉 좋은 상품성을 보장하고 거부된 삶은 상품성을 해친다. 목재의 구조적 조립이 완성되면 남은 일은 마감이다. 마감은 특히 제작자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는데, 기본적인 목적은 목재의 표면을 거슬리는 것 없이 매끄럽게 다듬고 도장재로 외부 환경과 차단하는 것이다. 목재에 마감재가 처음 발리는 순간은 목공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다. 마감재는 목재의 무늬에 대비를 더해 나뭇결을 선명하고 화려하게 만든다. 본연의 결을 극대화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마치 뿌연 노이즈 낀 영상이 고화질로 업그레이드 되는 것과 비슷하다. 마감재는 제작물의 내구성도 올려주지만, 물건을 좀 더 볼만한 것, 아름다운 것으로 승격시킨다. 선호하는 방향에 따라 수수함을 원하는 사람은 마감을 비교적 빨리 끝내며, 철저함을 원하는 사람은 목재 표면이 거울을 넘어서 거의 투명해질 때까지 마감한다. 목재는 나무로서 가져보지 못한 얼굴을 가공을 통해 얻는다. 설계와 조립, 마감의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 나무는 상품으로 재탄생한다. 비로소 그때 자연스러움따뜻함이 재등장한다.  

     제작한 목공품을 판매하고 싶었던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상업적 홍보물을 만들었다. 이미 나무를 재료로 그것에 어떤 형상을 부여했음에도, 나는 거기에 한 번 더 얼굴을 만들어 줘야 했는데, 만들기 과정을 두 번 연거푸 한다는 건 뭔가 구태의연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더욱이 그 얼굴은 인터넷으로 연결된 최대의 익명 다수로 하여금 상품 구매를 종용할 수 있도록 번듯한 것이어야만 할 것 같았다. 여기서 얼굴이란 소비자에게 가 닿을 수 있도록 조직된 이미지이자 가치의 총체다. 사진을 찍고 홍보글을 썼다. 결과물들은 어딘가 영 어색한 게 어엿한 구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적인 사진과 글만 구사할 줄 알던 나는 비로소 광고 콘텐츠들을 소비자가 아닌 판매자의 눈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나는 관찰하면서 모방했고, 그게 소위 초짜 티를 벗어내고 설득력을 얻어낼 전략이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모종의 나의 개별성을 담아 제작했던 목공품이 다른 제품들과 엇비슷한 방식으로 연출되고, 하여 내 홍보물과 타 업체 홍보물 내의 각각 상품들이 결과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내세운다고 깨달은 건 꽤나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두 번째로 만든 형상이 첫 번째 형상을 지워버린 셈이다. 판매의 등락은 전적으로 두 번째 얼굴에 달렸다는 것을 실감한 이후, 또 인터넷에 존재할 수 있는 형식은 두 번째가 유일하기에 홍보라는 미명 아래 많은 미사여구가 활용되었다. 이를 위하여 내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채택한 것들은 서로 특정한 귀결점을 공유했다. 촬영 소품: 미색 린넨 천, 다양한 식물, 인조 식물, 견과류 껍질, 건조된 꽃잎, 여러 가지 채소, 밝은 자연광, 어두운 조명에 촛불, 작은 돌 …. 홍보 문구: 우아한, 자연스러운, 따뜻함이 감도는, 친환경적인, 부드러운, 일상의, 섬세한, 화려한, 은은한, 특별한 …. 열거된 사물과 표현은 그 자체로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일관된 브랜드 기치를 성립하고 싶었던 내 의도는 이들을 특정한 맥락에서만 소비했고, 그들의 텅 빈 의미자연스러움따뜻함으로 채워 호도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내가 사용한 목재들은 자연스럽지 않다. 적어도 그 생산 과정은 소위 자연스러운 것과 거리가 멀다. 산업적 재화로써 나무는 인간의 통제 하에 규칙적, 정기적으로 자란다. 선발된 몇 가지 종을 재배하기 위해 (서울보다 몇십 배 넓은) 땅은 개간되고 그 위에 살던 이전의 생물 종은 정리된다. 그 땅에 식재를 하고, 나무는 목표된 성장치를 달성하면 벌목된 후 목재용으로 가공되어 판매되며, 남은 밑동은 굴삭기로 뿌리째 뽑혀 재활용된다. 이후 다시 땅을 고르며 동일 과정이 반복된다. 이러한 순환적 구조는 농사와 동일하다. 내가 소비한 자연스러움의 이미지란 분명 이러한 공정을 비껴갔다. 지금껏 두 번째 얼굴이라 애써 에두른 표현은 이른바 마케팅의 일환으로써 이미지 메이킹을 뜻한다. 내게 이 과정은 정신을 반쯤 몽롱하게 풀어줘야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판매자가 아닌 ‘나’를 유지하면 견딜 수 없는 껄끄러움이 입안에 돋아났는데, 당시엔 이러한 불편함을 애써 외면하는 게 열심히 하기의 일환이라 생각했다. 그 불편함은, 이 모든 게 결국 한낱 척하기에 불과하다는 무시된 확신에서 연유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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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즈려 밟히는 자갈의 소리를 듣는다. 자-갈. 자갈이란 아주아주 큰 자갈에서 떨어져 나와서, 또 그다음으로 큰 자갈에서 떨어져 나와서, … 셀 수 없는 탈락과 독립을 통해 계속 떨어지기를 반복해 …, 둥근 땅을 뒤덮은 작은 암석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갈 이전의 자갈과 다시 그 이전의 자갈로 되짚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어느새 자갈은 자갈이라 불리기 어려울 만큼 커져 있다. 이 무수한 쪼개짐은 작은 자갈로 하여금 큰 자갈로선 불가능하리만큼 넓은 땅을 차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들렀던 많은 공원의 자갈을 기억하니 왠지 다들 엇비슷하게 생겼고 엇비슷한 소리를 냈던 것 같다. 황빛갈의 누르스름한 바탕색 위에 몇 가지 이질적인 색이 얼룩덜룩 박혀있는, 이리저리 손가락 위에서 굴리면 이따금 마주친 빛을 소심하게 반사하는 그런 자갈. 그리고 독창을 할 줄 모르는 ‘자-갈’. 자갈은 소리를 냈다 하면 무조건 집단으로 내지른다. 내가 들어본 자갈의 소리란 그들이 여러가지 발로 짓이겨질 때 내는 크고 작은 함성들이 전부다. 내 신발이, 여러 가지 타이어가, 혹은 어떤 육중한 것으로부터. 부과된 마찰이 바로 그들 노래의 동력이다. 그러니 자갈의 노래를 묶어 앨범을 낸다면 수록곡의 제목에 발의 이름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만일 모든 자갈이 아주아주 큰 하나의 자갈에서 말미암아 온 거라면, 그래서 세상 모든 발의 움직임이 결국은 하나의 자갈 위에서 벌어지는 국소적 서성거림에 지나지 않는다면, 자갈에 있어서 각기 발들의 위치는 별로 중요치 않을 것이다. 모든 게 결국 자신의 몸에 의지한 채 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셈이니. 반대로 낱개 발에겐 자신의 위치가 너무나 중요하다. 대체할 수 없다고 여긴다. 발에겐 ‘이’ 땅이 ‘저’ 땅과 같을 수 없다. 이러한 차이에서 의미는 생겨나고 이 의미로부터 발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의 장소성에 따라 다르게 행동한다. 그러나 이 행동의 총합은 자갈이 덮고 있는 땅으로 와서는 모두 땅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땅에게 자신의 초록색 겉살 위에서 벌어지는 일 모두는 다름 아닌 자기 이야기이다. 땅에게 ‘이’, ‘그’, ‘저’는 서로 뭉근하게 섞여 무화 된다. 땅에서 자갈은 여기 있어도 되고 저기 있어도 되며, 발 또한 여기 있어도 되고 저기 있어도 된다. 혹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그래서 발이 자신의 위치를 자갈을 통해 구분 짓고자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자갈은 자신의 존재가 그러하듯 네 발도 땅 위 어디든 있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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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살이밖에 경험하지 못한 나로서 공원의 가장 큰 함의는 도시에 있는 크든 작든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가진 녹지이다. 내 관념 속 공원은 도심 속 최소한의 자연적인 쉼터로써, 도시에서 묻은 찌든 때를 씻어내는 초록색 대피소이자, 도시에서의 삶의 질을 평가하는 지표로써도 활용되는 어떤 구태의연한 조건이 부과된 그런 장소로 그려진다. 최근 일 년 동안 두 번의 이사를 했다. 아는 사람이 나 자신 밖에 없는 곳에서 사람 대신 시간을 채우고자 공원을 찾았다. 지도를 띄우자 연초록색으로 표시된 공원들 사이로 그들의 고른 분포가 눈에 들어왔다. 가령 도시 기획자가 계획한 의도가 짐작될 정도로. 그 초록색들 위에 ‘가고 싶은 곳’ 마킹을 찍고 하루 같이 점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생각한 것은, 도시와 달리 공원은 내가 이곳에 있는지 따져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공원으로의 입장은 도시에서의 퇴장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있으면 성미가 가라앉는 것 같았고, 내가 그곳에 존재할 어엿한 이유를 찾아 나라는 덩어리 안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됐고, 그러면서 다시금 성미가 가라앉곤 했다. 무심한 초록색에 둘러싸여 있으면 누구라는 질문도, 그 질문 앞에서 내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도 지워졌다. 이름이나 신분처럼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것은 매번 공원에서 그 힘을 잃었고, 그러한 것들로부터 나를 감추고 보호하는 익명성이란 방패도 공원에선 단지 무용한 것이었다. 그 덕에 나는 보다 가벼운 몸으로 언제까지고 원하는 속도로 걸어 다녔다. 공원의 초록색을 배경으로 내 걸음은 계속해서 툭툭 끊기고, 꼬부랑 휘고, 방향을 잃고, 나는 조금은 그 모든 걸 내버려 둘 수 있었다. 이따금씩 대충 맘 놓고 걷다 보면, 나라는 존재가 나여도 괜찮고 또한 내가 아니어도 괜찮겠다고 여겨지곤 했는데, 그 말인즉슨 어느 쪽이든 별 대수롭지 않은 문제 같았고, 그런 느낌에서 풍겨지는 일종의 해방감은 나로 하여금 공원에 더 머물고 싶게 하는 무엇이었다. 공원에서 가졌던 이탈감은 이른바 육하원칙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초록색은 무심하고, 아무 관심이 없고, 그래서 어떤 가치도 세우지 않는다. 그들의 언어엔 물음표가 없다. 그들의 언어는 비어있다. 답하는 존재로서가 아닌 걷는 존재로서 내게 내재하던 가치가 해체되고, 도시적 학습으로부터 거리감이 생겨나면서 나는 내가 본연의 무언가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하나의 동물 종 개체로서 좀 더 자연스러운 존재로, 초록색 편에 서서 나 또한 빈 언어의 구성원이 되었다. 단, 이 짧은 미몽은 단지 공원에서 다른 인간종 개체를 마주치기 전까지, 그로 인해 공원과 도시의 구분이 무효되기 전까지만 지속되었다. 그러면 무효된 경계 너머로 물음표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방금 맛보았던 자연스러움은 나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도취적 신기루였을까 ’?’

     자연은 의미가 비어있는 곳이다. 혹은 의미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곳이다. 인간은 그 텅 빈 곳을 다양한 방식으로 채울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 자연과는 상관없는 독립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은 많은 경우 다양한 긍정적인 형용사와 함께 문명의 분주함과 가득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항적 장소로 그려진다. 이때 자연은 마치 채워지길 기다리는, 또 채워질 수 있는 어떤 ‘빈 곳’과도 같은데, 여기서 비어있다는 것은 물질을 통해 채워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비어있음에서 두 가지 선택지가 분화한다. 첫째, 특정한 쓰임을 위해 빈 상태를 개발해 무언가로 채우는 것이고, 둘째, 보호라는 이름으로 빈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두 개의 선택지 모두 자연은 인간의 통제를 받아들이는 수동적 공간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전자든 후자든 빈 곳으로써 자연은 이미 채워진 곳, 즉 인간의 생활권을 증진시킬 것이라 믿어진다. 전자에서 자연은 상품과 관련된 생산 혹은 유통지대로 탈바꿈되고, 후자에서 자연은 공기를 정화하고 생물의 다양성을 보존하며 종국엔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는 작금의 보루로써 역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연은 (빈 곳이라는 표현과 실질적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빈 곳’이라는 이름의 배역을 수행하는 배우로 임명된다. 이 역할극의 감독은 인간이다. 빈 곳이라는 이름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장소’와 다름없으며 따라서 인간 중심적인 정의다. 인간의 의미 체계 밖에서도 세상은 존재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자연은 의미와 아무 상관이 없지만 적어도 인간의 언어에서 자연은 인간의 영향력 밖의 본원적인 무언가를 보존하는 곳이다. 그 본원적인 것에 대해 인간은 양가적인 욕망을 가진다, 이해하고 통제하고 싶은 욕망과, 이해할 수 없고 굴복하고 싶은 욕망. 그러거나 말거나 자연은 모든 인간의 욕망에서 미끄러진다. 자연은 인간의 욕망에 포착될 수 없다는 점에서 무심하며, 객체로서의 자연, 주체로서의 자연 같은 대립적 구도는 그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없다. 반대로 인간에게 자연이 자신 밖에 존재한다는 관념은 폐기될 수 없어 보인다. 인공적人工的인 것은 자연적自然的이지 않다는 이항 대립은 우리 사고방식 안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인공적인 것의 차집합으로써 자연적인 것은 맹목적으로 긍정적인 가치를 획득한다. 자연은 자연스럽다.

     의문스러운 것은 자연스러운 이라는 형용사는 과연 어떤 의미로 채워져 있냐는 것이다. 명사 자연은 자연스럽다를 통해 일면 의미를 획득한 것 같았는데, 하면 자연스럽다가 수반하는 다른 언어는 무엇인가. 만일 무언가를 가리켜 자연스럽다고 하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소리 밑에 깔린 기대되는 바는 무엇인가. 과연 자연에는 자연스럽다고 믿어지는 것이 존재하는가. 자연스럽다라는 표현은 편파적이다. 자연스럽다는 자기 그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부지불식간에 생략을 자행한다. 예컨대 재해를 일으킨 자연 현상을 가리켜 자연스럽다고 표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재해라 한다면 인간의 생활권에 어떤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기에, 자연재해를 보고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은 거의 피해 당사자들의 고통을 욕보이는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즉 자연스럽다는 적어도 자연의 구성 요소 중 일부분에만 해당한다. 자연스럽다는 자연이 이루는 집합 중 부정적인 요소를 제외한 안락하고, 친절하고, 도래하길 기대하는 긍정적인 부분 집합과만 짝지어진다. 따라서 ‘자연은 자연스럽다.’라는 등호는 성립하지 않는다. 

자연스러움의 표방물: 대규모 아파트 단지 공사장의 바리케이드 위에 합성된 저화질 공원 사진, 아파트 단지를 꾸며주는 정원과 그곳에서의 힐링을 강조하는 분양 광고, 차도 사이에 섬처럼 존재하는, 당분간은 누군가에게 밟힐 일 없을 녹지와 그 위에 규칙적인 간격으로 꽂혀 서 있는 나무들, 바로 그 밑 흙으로 덮이길 기다리는 동그랗게 포장된 나무뿌리, 자연 살균제 피톤치드(와 그것으로 후각을 상실한 임업 노동자들), 친환경 유기농 및 여러 가지 식품 인증 마크(와 기업의 수익을 극대화하는 로비활동), 식물 성분 유래 광고, 10차선 도로 중앙 분리대에 설치된 무수한 화분(과 그 안에서 죽어가거나 혹은 이미 죽은 식물들), 그 옆에 꽂힌 텅 빈 영양제 껍데기, 나무 무늬의 장판과 벽지, 식물보다 식물 같은 플라스틱 식물, 상가 1층에 자리한 꽃집과 그곳을 가득 메우는 식물들, 팻말 위에 쓰인 식물의 이름과 그것의 가격 단위 ‘반려식물가 … 원’, 휴식과 쉼의 장소, 불평하지 않는 장소, 기다리는 장소, 모성애가 가득한 장소,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장소 ….

     표방물들은 자연스러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연스러움을 은폐한다. 여기 전시되는 가치와 은폐되는 가치의 사이의 구분 선은 분명해 보인다. 전시되는 자연스러움은 기대 되어지고, 통제가 가능하며, 그래서 자본 시장으로 편입될 수 있다. 판매자가 수익의 극대화를 위해 상품의 이미지를 직조하고 상품을 살 만한 것으로 포장한다면, 소비자는 그 포장지를 보고 상품을 구매한다. 이 직조된 이미지는 ______를 보여주는 동시에 ______를 은폐한다. 의도된 모든 것은 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뭔가를 가린다. 이 글의 경우 빈칸에 들어갈 단어는 자연스러움이다. 이 단계에서 자연스러움은 보여지는 측면과 은폐되는 측면 두 가지로 갈라지고, 한 번 보여진 것은 다음 사이클에서도 보여지며, 은폐된 것은 또 은폐된다. 따라서 자연스러움을 둘러싼 편파적인 의미망은 이 순환을 거듭할수록 강화된다. 일단 한 번 소비된 이미지는 미래에 다시 소비될 기회를 얻는다. 상품을 구매할 때 다른 사람이 이미 샀다는 것만큼 확실한 구매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상품 이미지로 편집된 자연스러움은 예측 가능하다 여겨지고, 그래서 소비자로 하여금 통제력과 안정감을 준다. 이미지 속 자연스러움은 항상 유혹하는 자연스러움이자 전시되는 자연스러움이다. 얼굴의 일부분이 언젠가부터 얼굴의 전체를 차지한다. 그리고 은폐된 부분은 은폐되었다는 사실 조차 은폐되어 사라지고 만다. 자본주의에서 상품은 화폐 교환 가치와 사용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오늘날 여러 가지 사용 가치 중 상품이 표방하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경향은 지속해서 강화된다. 우리는 우리가 소비한 상품 이미지를 옷처럼 입고 벗으며 ‘나’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그래서 ‘나’는 갈수록 상품 이미지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나’가 구축될 수 있는 한계선은 시장 원리의 한계선과 일치되어 간다.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움은 시장이 제공하는 자연스러움에 포섭된 채 더는 그것을 이탈할 수 없다. 

     이 글은 자연스러움을 하나의 예로써, 자연스러움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말한다. 자연스러움을 통해 자연에 덧입혀진 의미망이 허상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비단 자연스럽다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떠올리면, 터질 것 같은 의미로 가득 찬 모든 형용사 앞에서 역설적이게도 텅 빈 언어를 낭만화하게 되고, 다시금 손 닿지 않은 자연스러운 자연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

     반쯤 발에 밟힌 반쯤 발에 안 밟힌 초록 풀을 본다. 이 풀은 ‘애초’에서 왔을까. 멀다면 얼마나 멀고 가깝다면 얼마나 가까울까. 이 풀은 애초의 후손, 애초의 변형, 아니면 애초의 모방, 표방, 어쩌면 오염된 애초가 지금에 발현된 모습일지도 모른다. 애초가 애초에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거쳤을 수많은 방해의 지층들, 이를 통해 이뤄진 전염과 오염…. 오염은 순수한 물질의 상태를 가정한다. 그렇지만 애초에 존재한 순수한 물질의 상태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삶이란 끊임없이 무언가와 연루되는 과정의 연속이고, 그래서 삶이란 내가 타자로 그리고 타자가 나로 개입해 들어오는 오염의 연속이다. 오염되지 않은 것과 오염된 것 없이 단지 오염은 발생한다. 그래서 ‘애초’ 또한 뒤죽박죽의 상태일 것이다. 애초를 떠올리면 바람에 맞춰 얼룩덜룩 거리는 무성한 녹지가 떠오른다. 거죽 위 짐승의 털처럼 빼곡하게 대지를 채워 울렁거리는 녹지. 그런 초록색의 지평선 뒤로 녹지와 울룩불룩한 구름이 구분 없이 소용돌이친다. 그리고 발밑의 이 풀은 분명 그런 애초에서 말미암아 왔을 것이다.

‘애초’의 비밀은 결코 폭로될 수 없다.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애초란 매 순간의 결과로써 드러나는 땅의 찰나에 불과하다. 밝혀지기를 거부하는 모든 비밀은 그 얇은 순간의 장막, 그 뒤 촘촘한 어둠의 장소에 숨겨져 있다. 앞으로도 계속 쌓여나갈 이 비밀은 내 피에, 네 피에, 사물의 피에도 흐른다. 단, 피에게 있어 ‘내’, ‘네’, ‘사물’의 구분은 없다. 그래서 땅 위의 모든 존재가 이 비밀의 공모자라 할 수 있겠다, 다만 비밀에 소외된 채. 결국 비밀에서 태어난 존재는 자신이 비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고, ‘네’가 ‘나’의 애초의 비밀로 연결된 형제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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