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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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은 ‘나’로 시작한다. 말이란 ‘나’의 생각을 그의 언어와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나’ 없이 글을 쓴다면, 표면적으로나마 ‘나’를 기입하지 않는다면, 눈 가리고 아웅만 하는 셈일까. 이 글은 한 단어를 지우기 위한 시도다. 이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나에게서 ‘나’를 지워보려 했던 지난 여름의 상상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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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겹다 나는 내가, 거울 앞에 참 많이 섰던 것 같은데 한결같이 ‘나’가 서 있는 건 불합리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가 진득하니 변함이 없다는 건 좋은 형용사다. 여기 거울 안에 진득한 이가 또 있다. 내가 진득하면 좋겠는데 정작 ‘나’가 진득하다니 아침마다 보는 거울 안에 희극이 펼쳐진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본 지가 언젠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를 봤다기보다 애써 ‘나’의 거죽을 보아온 오랜 시간들) 좋고 나쁜 건 없다, 그런데 ‘나’란 생명체에게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우선 고독할 수 없다. 서점 베스트셀러 매대 한 꼭지에서 본 것 같다, 오늘날은 고독하기 힘든 시대이기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다 확보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조언을.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고독은 혼자 있다고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가 입을 다물어야 고독이 시작된다. 나는 그래서 고독이 뭘 의미하는지, 도가 지나친 외로움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사실 알지 못한다. 계속 지껄이는 ‘나’의 지나친 부지런함에 힘입어 나는 그것을 경험한 적이 없다. 고독이 정말로 혼자 있음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나’부터 죽여야 한다, ‘나’는 나를 가장한 타인과 다름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이 살인을 자행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 사살 행위는 매우 모호하다, 시도 끝에 살인이 저질러 건지 단지 미수에 끝난 건지 확인할 방법이 없거니와, 살인이 가리키는 그 너머의 방향도 나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성공했다는 믿음 뒤에 단지 침묵하고 있는 ‘나’가 여전히 도사리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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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사 체험에 대한 진술을 읽는다. 돌아온 이들이 겪은 아주 밝고 안락했다던 빛에 대해, 시공의 경계 언저리 즘 자신보다 먼저 죽은 가족에게서 받은 마중을. 그들이 겪은 환대와 헤어짐. 이것이 만약 죽음의 보편적인 순서라면. 그래서 태초의 인간부터 계속 일어나는 방금 누군가의 죽음까지, 누군가 누구의 환대를 받고 다시금 누군가를 맞이하기를 무수히 이어서 반복하고 있다면. 씨실과 날실로 이어지는 기나긴 환대의 흐름. 그렇다면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을 이 환대의 참여자들을 과연 자아감을 가진 독자獨自이자, 개인으로만 이해해도 되는가. 개인이 그저 낱개로 한 개 두 개 세 개 셀 수 있는 존재라 한다면, 왜 우리는 공통의 빛을 경험하는가? 왜 동일한 경험이 개인이란 낱개를 관통하는가? 왜 이 빛은 일상적인 세계로부터 숨겨져 있고 죽음의 목전 다다라서야 목격되는가? 과연 ‘우리’는 무수한 ‘한 명’이 이루는 단순 집합 명사에 지나지 않는가? ‘우리’라 부를 것을 조직하기 위해 ‘나’가 필요하다면, 나와 우리는 어디에서 경계 지어지는가? 과연 ‘나’와 ‘우리’는 유효한 구분인가? 나는 이렇게 상상하고 싶다. 환대를 하고 환대를 받은 인물들, 즉 마중 나온 자들과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자들을 모두 ‘우리’로 복수형으로 치환한다면, 임사 체험에서의 마중은 ‘우리가 우리를’ 환대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그렇다면 동시에 ‘내가 나를’ 환대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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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말을 잘 들어라. 죽음이 찾아왔다. 외로워하지 말라. 죽음은 모두에게 일어난다.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너만이 아니다. … 너는 이제 여러 가지 빛과 소리 색 근원의 빛을 경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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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정쩡한 침묵이 다시 찾아왔을 때, 고독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고, 옆집 이웃에게 말한다, 연거푸 걸쳐 말한다, 마치 절대 고독할 수 없는 사람이냥. 그것은 대화라기보단 독백에 가까운 내뱉음이었고 그렇기에 내 말에 이웃이 말한 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선언을 앞장세워 일절 대외활동을 하지 않던 당시의 나를 정당화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독일어에서의 고독은 문자 그대로 혼자 있음을 의미한다. Alleinsein, 혼자allein 이다sein.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즐겨 좋아한다고 하지. 그런데 정말 알 수 없는 일은, 나는 물리적으로 정말 혼자인데, 내 주위 이 시공간에 인간이라 불릴 수 있는 건 여기 나 하나뿐인데, 왜 나는 고독을 실천하지 못 한 채 허공에 손가락만 오그릴까, 오늘도 구태여 알라인자인이라며 읊조린 게 다네, 더 혼자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구태여 반쯤만 혼자인 듯한 이 찝찝함, 나는 혼자인데 혼자로서 누리는 해방감은커녕 왜 모든 게 부자연스럽고 왜 이리 뻣뻣하게 느껴질까, 라는 것이었다. 당시 지내던 집은 약 20평 정도로 막 이사 들어와 짐도 없던 내가 혼자 살기에 무척 넓었다. 넓은 건 좋았지만 누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나는 주로 책상이 놓인 자리에 정박해 있었고, 집 안 어디를 둘러봐도 텅 빈 공간이 시야로 들어왔고, 이 허공은, 주어진 고독도 즐기지 못한다는 내 피해 의식을 자꾸만 들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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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과 1 사이에는 무수한 수가 존재한다. 따라서 0의 바로 다음 수는 없고, 1의 바로 직전 수는 없다. 무수하게 이어지는 0의 향연과 온점처럼 자릿수를 끝맺는 1. 무수히 0에 수렴해가지만 결코 영원히 0이 될 수 없을 숫자들.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 … 1. 따라서 인간은 0이 언제 0이 아니게 되고 1이 언제 참으로 1이 되는지 알지 못 한다. 그저 0과 1이 있다고 약속했을 뿐이고 그렇게 0과 1 사이의 가능성은 은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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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맘쯤 하루가 멀다하고 많이 걸었다. 강을 따라 걷거나 나무를 따라 걷거나. 단지 영문 없이 엄습하는 불쾌한 기분을 떨칠 별다른 방도가 없어서 걸은 것이었고, 그래서 걸었고, 그렇게 걷다 보면 불현듯 불쾌감도 까먹히곤 해서, 까먹히고 생긴 빈 자리에 다른 생각이 들어차는 것을 즐겼다. 심히 잔잔한 나머지 멈춘 듯 보이는 강 물줄기 옆에서, 몇 달 전이나 며칠 전, 아니 불과 어제 봤던 물방울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물방울이 전혀 다른 것을 알아차렸을 때. 앞으로 다시는 지금의 물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경악했을 때. 그렇다면 이 장소를 구성하는 물질 자체는 어제와 달리 바뀌었고 그에 따르면 한 장소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고정된 관념은 유효하지 않으며, 나아가 어딘가를 재방문한다는 것도 결국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았을 때. (재방문이란 표현은 첫 방문의 배경과 그다음의 방문 배경이 동일할 것을 전제하므로.) 그러니 반복되는 규칙이 만드는 운율에 동일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했던 때랄까 아니면, 언제부터 서 있었을지 모를 아름드리나무의 세월을 그것의 기둥에 한껏 자라난 울룩불룩한 살덩어리에서 읽었을 때. 건장하게 뻗어난 굵은 가지의 어디선가 댕강 끊긴 절단면 그 위로 다시 자라나는 가늘디 가느다란 가지, 두 개의 굵기 차이에서 사라진 시간 뭉텅이를 직감했을 때. 가지의 사라진 시간은 지금 어디를 표류하고 있을까 짐작해볼 때. 이렇듯 감정의 빈 자리에 다른 상념이 들어서면 ‘나’도 조용히 있곤 했다. 아마 그때 나는 고독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독도 그냥 지나가기만 한 건 아니어서 내 몸 어딘가 조용히 나무 옹이가 자라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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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다크에서 이뤄지는 49일간의 제의를 본다. 히말라야산맥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이 끊임없이 영상의 오디오를 채운다. 한기가 느껴지는 영상에서 라다크의 고행자는 200년의 세월 동안 노랗게 익은 사자의 서를 시신 옆에서 읽어 내려간다. 사자死者는 이승의 너머에서 다시 육신을 얻어 환생할 49일 동안 매일 고행자의 목소리를 통해 안내를 받는다, 홀로 생과 사의 여백의 공간, 즉 바르도Bardo, 둘do 사이bar에 머무는 동안 무엇이 일어나고 그것들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맞이해야 하는지를, 아마 이런 안내는 사자에게 처음이 아닐 것이다, 다만 무수히 반복되었을 이전의 바르도를 기억하지 못할 뿐. 안내자를 자처하는 고행자도 그와 같은 목소리를 나침판 삼아 이번 생의 육신을 얻었을 것이다. 사자가 누구의 육신을 빌어 환생할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다음’의 환생이 미래를 향할지 과거를 향할지도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오늘 죽어 과거에, 혹은 미래에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다시 물을 수 있다. 과거에 죽어 미래에 태어나거나, 미래에 죽어 과거에 태어나는 것, 사실 시간의 기준점만 달리했을 뿐 모두 같은 질문이며, 따라서 환생에 있어서 시간은 변수가 될 수 없다. (물론 상상적 결론이다.) 내가 지금 죽어 과거 미래 할 것 없이 새로운 시점에 태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흐르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우주 어딘가 존재할 몸을 빌려 환생하게 된다면, 시공간을 넘어서 그 누구도 다음의 나일 수 있다. 즉 ‘모두’가 ‘나’일 수 있다. 만일 내가 지금 죽어 과거에 존재한 내 조상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난다면 이렇게 전개 할 수 있다. 

과거에 태어날 다음의 나
= 조상의 몸을 빌려 태어날 다음의 나

조상의 몸을 물려받은 지금의 나
그렇다면 나의 몸을 물려받았을 지금의 나

     ‘모두’가 ‘나’일 수 있다면 반대로 ‘나’도 곧 ‘모두’일 수 있다. 지금의 나는 미래 혹은 과거, 혹은 현재의 누군가가 나의 몸을 빌려 환생한 결과일 수 있다. 내가 살아있는 세상을 기준으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내 자손이 나를 통해 환생했다면, 그렇다면 나는 빌려진 몸이다. ‘나’는 빌려진 자이고 ‘우리’란 이러한 부채 관계의 사슬로 맺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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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뜨면 ‘나’에게 의사를 묻는다. 뭘 하고 싶고 뭘 하기 싫은지. 지금 이불을 걷고 몸통을 세우고 싶은지 아니면 좀 더 누워있고 싶은지. 하루를 시작하고 싶은 게 착각일 수 있으니 다시 생각해보라는 친절을 아침마다 베푼다. 잠을 쫓으며 커피를 마시고 싶은지, 마신다면 창밖을 보며 마시고 싶은지 아니면 뭘 들으며 아니면 뭘 보며 마시고 싶은지, 그러고 커피를 마시며 묻는다, 이 담엔 운동을 하고 싶은지, 억지로는 안 해도 된다며 너스레를 떨고 달리기를 할 거면 어떤 코스가 좋을지 묻는다. 첫 질문은 두 번째로 이어지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가 동시에 팝업창처럼 떠오른다, 에러 문구 노란 느낌표와 함께. 긴장한다. 의식되는 모든 순간은 ‘나’의 의사를 묻는 지난한 과정으로 채워진다. 더 정확하게 듣기 위해 다시금 긴장한다. 고려할 인물이 ‘나’만 있는 상황에서, 아니 천혜의 환경이잖아, ‘나’만 있잖아, 말 그대로 뭐든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자기한테 집중을 하래, 집중하고 있어.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게 그렇게 좋기만 한 거라면 지금 이보다 잘할 수 없을 거 같은데 화면을 가득 메운 팝업창 앞에 결국 압도당한다. 도망치기 위해 활자 위로 눈을 내리박고 라디오로 귀를 틀어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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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 한쪽 끝에 위치한 점은 종이를 반 접으면 바로 반대편에 가 닿을 수 있다. 이처럼 U자로 굽은 시공간을 연결하는 통로를 과학에선 웜홀이라 한다. 웜홀은 두 개 시공간의 사이로써 환생에 필요한 49일간의 바르도와 닮아있다. 웜홀과 바르도 모두 저편에 따로 존재하던 서로 다른 두 개의 장소를 연결시킨다면, 과연 무엇이 이 사이 장소를 관통할까? 느닷없이 뻥 뚫린 채 도사리는 구멍엔 어떠한 충동이 내제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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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너지는 –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일은 물체에 힘을 가했을 때 힘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 거리이고, 이때 힘은 힘을 매개하는 입자에 의해 전달되는 작용이다. 즉 에너지는 – 입자를 통해 전달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육신의 한계로 입자 단위에서 약동하는 에너지의 기초적인 흐름을 느낄 수 없다. 이 몸 또한 전자기장의 에너지를 통해 유지되고 있음에도, 즉 우리가 에너지 그 자체임에도, 에너지는 여전히 우리에게서 가려져 있다. 우리는 추상적이고 거대한 이름(예컨대 중력 같은)의 도움을 받아서만 에너지를 알지만, 동시에 이해하진 못 한다. 한편 에너지는 시시각각 입자를 통해 이동하며 자신의 형태와 방법론을 바꾸고, 그래서 어디에도 영구히 머무르지 않으며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에너지의 세계엔 영원한 정박지가 없다. 따라서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에너지는 계속 흐른다, 강줄기처럼, 강에 오직 흐르는 현상만이 있고 같은 물방울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에너지는 주인 없는 공공재로써 모든 존재 사이의 여백을 빽빽하게 들어 채운다. 나는 지금 ‘나’란, 이러한 공공재 에너지를 통해 발현되는 소프트웨어에 가깝다고 주장하려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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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를 심는 사람』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황량한 땅에 물을 얻어 마시기 위해 들어간 대화 없는 오두막집과 그곳에서 만난 나무를 심어왔고 앞으로도 심어갈 한 노인에 관한 이야기. 가히 폭력적일 만큼 일방적으로 지나가 버리는 시간을 통과하며 마침내 그가 일궈낸 숲에 대한 이야기. 그 노인은 옆에 인간이 있어도 그리고 또 없어도 그것은 변수가 되지 못 한다는 듯, 해왔던 행동을 행동했고, 세상의 가치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단지 스스로에게 부과한 일을 수행하는 것만으로 하루의 끝에서 편히 눈 감는 사람이었다. 불면의 밤을 지새우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마 고독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 것 같았고 나도 겪어보고 싶다는 순수한 궁금증이 시작된 우화. 나는 이야기에 담긴 고독을 외부 세계와의 차단이라 생각했고, 그 노인에겐 홀로 24시간을 보내는 작은 집과 나무를 심는 땅이 있었다. 나에겐 지금 홀로 24시간을 보내는 작은 집과 산책하는 공원이 있다. 여전히 나에게 고독은 오리무중이다. 둘 중 하나이리라, 고독은 어떠하리라 먼저 단정 짓고 그에 내 경험을 끼워 맞추고 있거나, 혹은 고독할 마음이 없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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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특정하게 작동하는 기계장치이자 소프트웨어이기도 하다. 기계가 인풋input을 아웃풋output으로 만들어내는 장치라면, 나도 그런 범주에서 다르지 않다. 외부 자극을 감각기관을 통해 접수하고, 특유의 사고회로를 거쳐, (아마 여기에서 ‘나’가 작동하겠지) 어떤 형태로든 결과를 산출한다. 이 단순한 구조가 너무 닮은 탓에 인간과 기계 사이의 유사성을 무화시킬만한 차이점을 찾기가 더 어려워 보인다. 현세대가 주창하는 ‘나만의 것’은 사실 한 기계의 잘 짜인 고유한 연산 시스템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나’라는 것은 프로그램과 이음동의어다. 그리고 이런 기계들은 일을 하기 위해 동력원이 필요하다, 그것이 전기가 됐든 석유가 됐든, 기계는, 아니 연산 장치는, 아니 사고방식은, 아니 ‘나’는 동력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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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화수소는 탄소와 수소만으로 이뤄진 유기 화합물이다.
석유는 탄화수소의 액체 혼합물이다.
생명체는 탄소, 수소, 질소 그리고 산소 등으로 이루어진 유기 화합물이다. 

석유가 만들어지는 유기 퇴적층은 대부분 식물성, 동물성 플랑크톤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Plankton 플랑크톤은 돌아다닌다는 뜻의 그리스어 planktos 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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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너지는 우리 사이를 돌아다니고 그렇게 우리를 이어준다. 사람 허벅지 굵기만한 해저 케이블이 대륙 사이를 잇고, 케이블을 타고 전기 신호가 흐른다. 우주엔 인공위성이 있다. 내가 보는 컴퓨터 화면의 정보는 아마 문자 그대로 바다를 건너왔을 것이고,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상대방의 목소리는 우주 공간을 왕복했을 것이다. 그러한 전기 신호를 인지하고 나는 다시 전기 신호로 뇌의 뉴런을 자극해 하나의 생각에 다다른다. 그것을 나는 칼로리를 소모하며 발화하고, 그 말이 타인의 사고 회로를 자극하고, 타인이 새롭게 만들어낸 뇌 전기 자극, 즉 그의 생각이 다시 불특정 세상으로 뻗쳐간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대전제가 있고, 가변적인 상태는 에너지가 움직인다는 증거이며, 에너지의 발현 방식은 변화의 곡절마다 바뀐다. 언젠가 내가 인공조명 빛을 먹고 자란 식물을 섭취한다면, 나는 전기를 먹어 체내 열에너지를 생성한 셈이다. 이렇게 에너지가 에너지를 만들고 그 에너지가 새로운 에너지를 만든다. 우주는 A에서 B로, B에서 C로 움직이지 않고 a에서 a’로, a’에서 a’’로 이어지는, 에너지의 변주로 연결된 사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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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 없는 기분은 사라질 줄 모른다. 아침마다 눈을 뜨며 방 안에 가득 찬 물음표의 냄새를 맡는다. 더 먹을 것이 없어 그저 씹는 본능만 남아버린 에리식톤의 턱처럼, 이 물음표들은 새로운 경험을 잃어버린, 하지만 그것을 여전히 탐닉하는 나의 턱이 남긴 흔적일 테다. 바이러스 확산과 동시에 나와 ‘나’만이 함께하는 매일 속에서 지각하고 분석하고자 하는 나의 욕구는 새로운 자극을 원하지만, 불가능한 조건들로 공회전만 한다. (이 모든 상황이 종합적으로 전대미문의 해괴한 일이기도 하지만.) 헛도는 바퀴가 물음표의 연기를 만들고 영문 없는 기분은 공기를 가득 메워 이제 내 폐 속을 파고든다. 나는 왜 여기에 이 모습으로 이렇게 존재하는가. 어느 순간 ‘나’의 비위를 살피기보단 오히려 해치고 싶은 충동이 든다. 그냥 간단하게 그만 고려하고 싶다. ‘나’의 무게를 풀어주고 싶다. ‘나’의 중요도를 격추시키고 싶다. 나만의, 고유한, 그래서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에서 있어도 없어도 그다지 상관없는 확률의 문제로. 나라는 존재는 우주적 관점에서 어마어마하게 작은 확률의 소산에 지나지 않고, 그렇다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쪽이 더 당연하거나 더 이치에 부합할 것이다. ‘나만의 것’이란 표현에는 경계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나’는 경계 안에 온전히 모셔져 있는 셈이다. 오로지 그 경계 안에서 탄생하였다고 믿어지는 활동을 향하여 우리는 ‘나만의eigen’이란 수식어를 단다. 나의 경계가 있듯 너의 경계도 있다는 환상 속에 모두가 자기 것만을 돌보는 사이, 경계와 경계의 사이는 버려진 진공상태로 쪼그라든다. 빈 공간은 단지 점령 당해야 하는 가능성의 땅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담 격추는 이렇게도 가능하다. 나를 사이에 낀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나를 점령하는 주체로 자리매김하지 않고, 점령 되는 땅으로 배경화 하는 것이다. ’나’의 경계를 국경 삼아 빈 땅을 차지하려는 이 게임에서 벗어나 내 자신도 그 무엇으로부터 점령 당하도록 내팽겨 두는 것. 과거에 자신이 쓴 일기를 보고 놀라본 경험이 있는가? 나는 내 필체로 적힌 과거의 기록들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도저히 내가 한 생각이라 믿을 수가 없어서. 그렇다, 시간의 놀음 안에서 자신은 자신에게도 타인이다.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은 그 무엇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이, 혹은 끊이지 않는 가변의 상태가 그것을 가능토록 가만두지 않는다. 나는 사이와 사이에 낀 존재로 시간을 관통한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결론 없이 이어지는 가능성들이다. 나는 사실 아무래도 좋다, 여기에 ‘나’로부터 해방될 가능성이 놓여있다, 나는 정말 아무래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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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영화 『Into the Inferno』를 보면 인도네시아의 한 화산섬의 주민들은 용암에 선조들의 영혼이 깃들어 산다고 믿는다. 그 믿음을 들은 나는 죽음 이후 용암을 찾아 떠나는 혼을 상상한다. 혼은 용암을 들끓게 하는 에너지이며, 그들의 분노로 화산이 폭발한다. 이따금 분화구에서 몇몇 용암 조각이 튀어 오르면 안내자는 방문객에게 용암을 등지고 도망치지 말라고 조언한다. 오히려 용암이 어디를 향해 포물선을 그리는지 끝까지 응시하다가 정확히 몸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덮쳐 오는 혼의 조각을 마주 봐야만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렇게 영상엔 분화구 옆에 서 있는 혼들과 튀어 오르는 혼들이 공존한다. 영상을 조금 빨리 감으면 혼은 마치 점프를 하듯 포물선을 그리며 사람들 사이를 옮겨 다닐지도 모른다. 산꼭대기에서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가 오버랩 된다. 용암은 인간의 혼을 거두어들인다. 만약 용암 덩어리가 튀어 올라 주류를 벗어나듯이 용암에서 환생이 이루어진다면, 바르도와 웜홀은 생각보다 가까이 우리와 지표면에서 공존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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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유石油는 생명에서 비롯된다, 돌 기름은 생명의 무덤을 아우르는 공동묘지이자 피부 아래에 흐르는 지구의 피다. 생명의 시신이 석유가 되기 위해선 오랜 차단의 시간, 고독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산패로 인해 유해들이 석유가 되기 이전의 퇴적층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러니 퇴적층은 고독으로 쓰여진 기록이다. 층층이 아로새겨진 생명의 아카이브가 석유에 이르러서 모든 것이 융합된 에너지의 형태로 조용히 흐른다, 끈적하고, 빛이 닿지 않는 깊은 곳에서 청자 없는 노래를 부르며. 퇴적층의 보기 좋은 선형적 역사는 느긋이 석유로 녹아든다. 우리는 그것을 천연자원이라 부르고 산업 에너지원으로써 다루지만, 피가 우리 몸의 역사를 기억하듯 지구의 역사를 기억하는 주체로서 우리는 석유를 새롭게 볼 수 있다. 석유는 칠흑처럼 까만 그 색만큼이나 비가시성으로 이뤄진 비밀 그 자체다. 석유가 석유의 모습을 갖추기 이전의 생명의 형태는 영원히 비밀의 영역에 머무를 것이다. 석유로 변환된 플랑크톤의 기원도 비밀일 테니, 비밀은 비밀로 전수된다. 그리고 세상은 그 비밀의 힘으로 돌아간다. 석유가 끓으니 열이 생기고, 석유가 끓으니 각종 재화가 등장하고, 석유가 끓으니 세계가 구축된다. 구축된 세계를 다시금 지탱하기 위해 석유는 계속 끓는다. 이렇게 구축된 우리의 세계는 따라서 석유의 비밀로 건설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제 과정을 거친 모든 물질은 정제 이전의 뒤섞인 상태에서 연유하였고, 정제의 결과물로써 우리가 접하는 물질은 절대로 이전의 형태를 보여주지 않기에, 물질의 이면엔 반드시 비밀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비밀의 단계에선 보다 다양한 이질적인 것이 한데 공존한다. 만일 우리가 발가벗겨진 채 숲에 던져져도 우리 몸 안에는 석유가 있다, 섭취 가능한 형태로 석유를 먹었을 테니 내 피 어딘가 석유가 흐를 것이다. 삼켜진 석유는 빛 들지 않는 내 몸에서 고향에 돌아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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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을 자는 동안 ‘나’의 스위치는 내려간다. 잠이 생명 유지에 있어 필수적인 이유는 많겠지만, 어쩌면 내가 ‘나’를 통해 살지 않아도 되는 허락된 시간이 우리를 계속 살게끔 하는 것일지 모른다. 일시 정지 상태를 풀고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낮의 ‘나’의 활동이 재개된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Verwandlung』의 주인공 그래고르 잠자Gregor Samsa는 잠에서 깨어나 벌레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잠자는 동안 무엇인가 일어난 것이다. 나는 그래고르가 벌레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변화된 그 결과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모종의 이유로 그래고르는 어제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이 다른 존재라는 걸 감지한 것이 문제다. 그래고르는 인간의 몸으로 돌아갈 수 없고 다시 한번 벌레에서 다른 존재로 변신할 수도 없다. 그래고르 그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과연 어젯밤 나에겐 무엇이 일어났는가. 나의 혼이 다른 존재의 그것과 뒤바뀌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나의 혼이 나를 떠나고 남긴 빈 자리에 벌레의 혼이 들어왔다면 나는 왜 나를 벌레라 여기지 않고 ‘나’로서 여기는가. 나라는 존재가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을 ‘나’로 인식하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기계 장치이기 때문은 아닐까. ‘나’를 구동시키는 에너지의 종류와 상관없이 말이다. 지금 이 순간도 에너지와 에너지는 교차하고 있다, 당신과 나의 혼이 교환된다. 이 역동성을 모르는 우리는 ‘나’의 경계 안에 갇힌 슬픈 이유를 모르는 슬픈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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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 빛이 지구에 도달하여 우리가 빛을 보기까지는 약 8분이 걸린다. 우리가 자연광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8분 과거의 빛을 통해 지금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태양에서 지금 출발한 빛은 8분 뒤의 지구의 미래와 동시적이다. 나는 백악기에 형성된 석유에서 만들어진 바셀린을 입에 발라 은연중에 그걸 먹고, 그렇게 내 몸엔 백악기에 퇴적된 플랑크톤의 흔적이 쌓인다. 이토록 과거와 미래가 엉켜있는 현재에 사는, 허나 영원한 현재에 갇혀있을 나는 언젠가 죽을 것이고 우주 어디선가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을 산파 삼아, 언제 그랬냐는 듯, 또 태어날 것이다. 이 글은 ‘나’를 가능케 하는 동력원을 찾고자 하는 노력과, 나와 우리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나를 더는 나만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기 위한 상상의 씨앗들을 기록한다. 자아의 동력원을 나는 대략 ‘혼’쯤이라고 여긴다. 그 혼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당신을 벗어나 서로 교차하고 있을지 모른다.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는 경계를 허문다. 우리는 동일한 에너지로 작동하고, 이 에너지가 경계 없이 유유히 흘러감을 지금은 알겠으니, 저번 여름 ‘나’에 대한 격추는 이로써 일단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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