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et발·feet단위

feet 발 · feet 단위

그래서 걸어가는 시간 속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지구력을 기르고 근육을 키우고 체지방을 태우고 우울을 방지하고 햇빛을 받고 늦잠을 자지 않고 나태를 방지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위해 자주 달렸다. 옷을 갈아입고 러닝화를 신고 얼마나 운동했는지 알기 위해 문밖을 나서며 시간을 확인하고 트레킹 어플의 시작 버튼을 꾹 누지른다. 그 누지름에 참 많은 게 담겼었다, 이 뜀박질이 오늘도 성공적이고 의미 있기를. 희망하던 그 성공과 그 의미가 무엇이던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막연하더라도 그런 바람이 없었다면 애초에 뛰지 않았을 것이다. 몸을 풀고 슬슬 달리기 시작한다, 한 번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많은 위함을 위해 단지 숨이 차고 힘들다는 이유로 멈춰 설 수 없었다. 힘들다거나 그만두고 싶다는 감정적 외침은 위하는 것들 앞에서 무시당했다. 5분마다 울리도록 맞춰 놓은 알람이 기다리고 기다려도 울리지 않기에 슬슬 짜증이 치밀고, 육체적 힘듦보다 그 5분을 참는 인내심에 더 큰 에너지가 쏟긴다. 가끔은 일부러 웃었다. 가끔은 나이키나 러닝화 광고에 나오는 힘들지만 그것을 즐기는 행복한 모델들처럼 허공을 향해 웃어 보였다. 햇빛이 거룩하다는 듯이 뛰어도 보였지만, 그것을 정말로 봐줄 사람은 누구도 없었기에 다만 나를 위해 가끔 그렇게 연출하곤 했다. 매일 같이 달리던 그곳의 풍경은 항상 아름다웠지만 웬만큼 아름답지 않고서야 나는 스스로에게 감상을 위한 멈춤을 허락하지 않았고, 정말 아름다워서 잠깐 사진을 찍기 위해 멈출지라면 5분 알람이 울리고 난 뒤에도 대략 멈춘 시간 만큼의 몇 초를 더 뛰었다. 그때 나는 어떤 형태로든 확신할 수 있고 통제 가능한 온전한 믿음이 필요했고 나에게 주어진 것은 나였기에, 그런 몇 초를 통해서나마 내가 나를 통제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던 것 같다. 부단히 반복되었을 일에서 십으로 이어지는 마음속의 숫자들. 이제 정해진 시간을 채우고 돌아가는 길 트레킹 어플에 종료를 알린다. 잠시 멈춰 서서 그렇게 찍은 사진을 소셜 계정에 올렸고, 그 게시글엔 ‘와 진짜 달릴 맛 나겠다.’라는 댓글이 달렸고, 그 말 앞에 나는 무엇을 느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 도시에서 탄 자전거는 모두 목적지로 가기 위한 수단이었다. 대여 자전거였는데, 한 달에 만삼천원 가량을 내고 이용권을 구매하면 언제 어디서나 첫 30분 동안은 무료로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도시의 대중교통권은 너무 비쌌기에 당시 나는 이 30분 시스템에 거의 감사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런데 처음 30분이 넘어가면 다음 30분마다 천원 조금 넘는 추가 요금을 내야 했다, 나는 그 과금이 죽기보다 아까웠고, 자전거만 타면 무릇 전쟁에 임하는 장군처럼 비장함을 안고 출발했다. 그렇게 30분 안에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조바심은 내가 새로운 도시에서 적극적으로 길을 잃고 헤맬 용기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길을 잃을 수 없다는 모종의 박탈은 효율의 극대화를 의미했다. 최단 거리와 정확성을 요구하는 효율성을 위해 30분 동안 나의 모든 감각은 핸드폰 지도상의 파란색 경로만을 위해 활성화됐다. 그렇게 나는 그 도시를 ‘자전거로 30분’이라는 단위로 익혔다. 새로운 곳을 갈 때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예상 경로는 소실점이 존재하는 삼차원 길거리가 아니라 지도 위에 일직선으로 쭉 이어지는 한 붓 그리기로 연상됐다. 필요한 물건을 사러 자전거를 타고 나섰던 그 날의 먼 길도 다를 게 없었다. 돌아오는 길, 여러 차례 30분과의 대결에 이미 지쳐있었던 나는 낯선 풍경 속 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을 보며 패배를 직감하고 걸어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지도 위에서만 존재하던 오감이 여기 아래 흙 땅으로 곧장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여러 무리의 까마귀 떼가 하늘을 메우며 우짖고, 겨울날 이른 시간에 찾아든 노을의 어두운 빛무리가 풍경을 덮으며, 어린이들이 과자를 나눠 먹으며 짓는 미소를 본다. 가장 오래된 낙엽 위에 쌓인 오래된 낙엽과 그 위에 다시 쌓인 덜 오래된, 가장 새 낙엽들이 만들어내는 질퍽이는 숲길이 펼쳐지고, 그곳을 가로지르는 내 몸이 만드는 소리를 듣는다. 창백한 공기 속에서 내 체온이 스며든 옷깃으로 목과 손을 파묻는다, 그 온기에서 마치 집에 돌아온 것 마냥 꼭 맞는 안락함을 느낀다. 거침없이 페달을 밟으며 지나갔을 물웅덩이를 지금은 조심스럽게 돌아 걸어간다, 물이 비추는 건너편 풍경을 덩달아 보는 것은 덤이다. 천천히 변화하는 공기를 지켜본다. 도보가 아니었다면 이 모든 것은 효율과 안전상의 장애물, 눈길을 거둬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도보는 도보의 속도로만 보이는 풍경을 선사한다. 

     그 버스는 마치 밀실 같았다. 겉으로는 그간 알던 것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버스였지만 실내엔 이층 침대가 삼열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고개도 모자라 상체를 한껏 수그려 아래층 침대에 몸을 부벼 넣어본다. 열대 기후대에 속하는 그 나라의 후텁지근한 공기를 잊기 위해서 이냥 에어컨은 기름값이 걱정될 만큼 미친 듯이 작동했고, 그걸 알기라도 하듯 자리마다 홑 담요가 놓여있었다. 덮고 싶지 않았지만 갈 길이 하루밤을 통과해야 할 만큼 멀었고 찬 공기는 냉방병에 걸릴 것 같은 기세였기 때문에 이미 식은 피부 위로 담요를 덮고 돌아누워 창문 밖을 바라봤다. 창문 밖엔 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자신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고, 마치 그래서 물리학의 사고실험처럼, 덜컹거리는 차의 진동이 아니었으면 내가 지금 이동 중인지 알 길이 없었다, 4D 영화관의 의자처럼 제자리에서 덜컹거리고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지. 승객은 가득했고 나도 그 승객 중의 한 명이었지만 그들과 나의 차이점은 나는 내가 내릴 곳이 어디일지 분간할 방도가 없었고, 그 지명을 옳게 발음할 수도 없었다, 그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 수시로 지도 어플의 위치 정보를 확인했지만 외딴곳을 달리는 버스 속에선 그마저도 잘 잡히지 않아 내 위치를 의미하는 파란 점만 허연 여백 어딘가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만약 지도 어플의 하얀 배경과 현실의 검정 풍경이, 네거티브 필름이 현실과 맺는 관계처럼, 서로가 서로를 반전된 색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부유하던 그 파란 점은 정말이지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한 셈이다. 이런 불안과 달리 다른 승객들을 잠을 자거나 태평히 휴대폰을 보고 있었는데 그들의 휴대폰은 내 것과 달리 인터넷이 잡히는지, 안 잡힌다면 뭘 그리 열심히 보는지 궁금한 동시에 그들과 나 사이에 자리한 이물감을 느껴졌다. 가끔은 반대편 차선을 달리는 다른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보고 내가 이동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내 몸은 이동하고 있는데 정작 나는 그에 걸맞은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는 것과, 그에 걸맞은 감각의 변화도 인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다시 땅을 밟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했다. 그래도 내가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진짜였고 우려와 달리 예정된 시간에 나는 예정된 이름의 지명에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땅을 밟자 파란 점도 제 자리를 찾아 고정됐다. 나는 어디를 통과해 온 걸까. 후끈한 공기가 차가운 피부에 닿아 바로 들척거렸다.

     일 년 동안 매주 월요일 서울-대구를 기차로 왕복했으니 그 해엔 적지 않은 시간을 철도 위에서 보낸 셈이다. 매번 직접 예매했지만 마지막 여정까지도 구미에 맞는 명당자리 좌석 번호를 외우지 못 한 탓에 이 자리 저 자리를 떠돌아다녀야 했다. 출입문과 적당히 떨어져 있으면서 정방향이고 장애물 없이 넓게 뚫린 창문이 바로 옆에 하는 그런 좌석. 뽑기를 잘못하면 벽만 바라봐야 했고 이따금 운이 따라 좋은 좌석에 앉으면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봤다. 300km/h의 속도로 달리는 기차 안에선 두 개의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세계를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창가 바로 옆자리는 속도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를 체감하기에 제격이라 할 수 있다. 나로부터 왼쪽에 기차 열차 칸이 익숙하디 익숙한 시공간으로 펼쳐져 있다면, 오른쪽 유리 너머엔 마치 게르하르트 리히터 Gerhard Richter의 스퀴즈 페인팅처럼 모든 게 찌그러져 색색의 선으로만 보이는 풍경이 요동치고 있다. 한 쪽이 3차원 공간이라면 반대편엔 속도에 눌려서 모든 게 가로선으로만 보이는 2차원 색 면이 창문을 액자 삼아 자리한다. 기차가 수평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에 풍경도 앞에서 뒤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모든 게 선으로 변할 정도의 속도에서 선들은 위아래로만 움직인다. 이 현상은 기차 본체와 가까운 사물을 볼수록 심해지는데 선로 바로 옆에 피어난 식목들이 특히 그러하다. 그렇게 중력에 반하여 수직으로 자라난 풀들이 가로로 춤추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다. 모든 형태가 색으로 환원되는 그 풍경은 묘한 안도감을 주는 것이어서 나는 대부분의 시간에 색 띠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가 잠들기를 반복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선로 옆의 풀의 입장에서 나는 아마 찰나보다 못한 시간에 지나가는 아주 짧은 선이었을 것이다. 내가 선로 옆 한 풀, 그 앞을 지나갔을 때, 우리는 아마 거리상 꽤 가까웠으리라. 그래도 내가 그들의 얼굴을 못 봤듯 그들도 자신을 바라보던 내 멍한 표정까진 읽어 낼 수 없었겠지. 단지 얄팍한 차체 벽을 기준으로 나는 안에 있고 풀은 밖에 있기에 이런 극단적인 현상이 일어난다는 생각을 하면 뭔가 불합리하거나,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점 앞에서 억울한 기분이 들곤 했다. 풀이 봤을 때 나는 어떤 색과 어떤 굵기의 선이었을까. 선인지 점인지 얼룩인지, 혹은 나를 둘러싼 환경과 한 데 섞여 단지 엉켜있는 회색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희박한 대기 사이로 예외적인 기압을 유지하는 작은 점 하나가 지나간다, 해의 유무의 따라 극단적으로 변하는 온도 차 사이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작은 점이 지나가고 그 안에 내가 있다. 비행기 안의 모든 조건은 이륙과 착륙을 단위로 일정하게 유지되는데 그래서인지 그곳에선 항상 동일한 소리와 진동이 들린다. 밀실이 있다면 비행기처럼 확실한 밀실도 흔치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나는 종종 얼굴도 모르면서 있으리라 여겨지는 무수한 동승객들에게 모종의 동지애나 소속감을 느끼기도 했다, 마치 다 함께 거대한 규모의 방 탈출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비행기의 기체 안은 내가 경험한 것 중 가장 예외적인 공간에 속한다, 접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돈을 지불하여 구매한 나는 왜인지 그만큼 취약한 위치에 처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비행에 대해 내가 아는 바는 바깥 대기 속 분자 수 만큼이나 희박하다. 뭔가 더 알아내기 위해 앞 좌석에 부착된 승객용 모니터를 이리저리 두드려 본바, 나의 위치는 출발지와 도착지를 잇는 둥글한 포물선에 고정된 조악한 그래픽의 비행선으로 그려진다는 것을 알아낸다. 이 가상의 비행기는 점진적으로 움직이고, 같은 모니터 위로 km/h단위의 기체 속도와 °C단위의 기체 밖 온도가 안내 되지만 그것들은 숫자에 지나지 않는 터라, 정보를 얻어도 무언가를 이해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내가 이 비행기에서 맡은 역할이 있다면 정숙을 지켜 밀실 안의 안전과 치안 확보에 이바지하거나, 잠을 자거나, 혹은 내가 잠드는 것을 막는 다양한 요소들에 괴로워하는 것 정도가 있다. 그렇게 착륙까지 기다림의 시간이 몸부림으로 채워진다. 언젠가 불이 소등되어 어두컴컴한 비행기에서 잠에서 깨어나 습관적으로 옆에 있던 작은 창문을 연 적이 있다, 작렬하듯 밝은 빛이 좁은 틈이 열리자마자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빛은 어둠 속에서 거의 새로운 통로 혹은 공간을 만들어내면서 내 몸 위로 모양을 내리쬐었다. 본 적 없이 밝은 그 빛에 한 번 흠짓 놀라고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뜨거운 온도에 다시 놀라 창문을 곧장 닫아버렸다. 놀람에 잠이 먹혔다. 다시 창문을 조금 열고 이번엔 유리창을 천천히 만져봤다. 뜨거웠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제야 뭔가 이 상황을 깨우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포물선의 고점을 지나는 중이라고. 방금까지도 이 사실을 모른 채 어둠에서 잠을 청하던 나는 이 찰나와 같은 경험을 통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비행기는 아주 예외적인 점 하나다. 공기의 망망대해에서 바람도 불지 않고 온도도 바뀌지 않는 이상한 점, 밖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그 안은 훤하게 밝을 수 있고, 반대로 흰 도화지처럼 밝아도 오밤중처럼 깜깜할 수 있는 점, 그리고 그 안에 아무것도 모르는 나.

     그래서 걸어가는 시간 속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도보는 내 발과 지구의 표면이 맞부닥치는 전투다. 그 전투의 결과로 생긴 마찰을 통해 나는 걸어 나간다. 실을 꿴 바늘이 직물을 이리저리 통과해 나가듯 내 발은 땅에 수를 놓는다. 다른 도구 없이 내가 저어쯤에서 이이쯤으로 이동했다는 건 무조건 한 선 긋기가 가능한 보이지 않는 선이 땅에 그려졌음을 의미한다. 그 간단한 규칙이 주는 명쾌함이 필요해 가끔은 오로지 걷기만을 위해 아무 짐 없이 집을 나선다. 걷다가 문득 내 뒤통수에 남겨진 풍경이 궁금해질 때면 뒤를 돌아본다, 잠깐 전만 해도 나는 저쪽 강둑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어느새 물 위를 건너 이쪽 강둑을 따라 걷고 있다, 강 건너 저쪽을 걷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 저기에 내가 머물렀었는데, 지금은 없다. 아마 이쪽을 걷던 나도 곧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도보의 느린 속도가 이런 하릴없는 생각을 가능케 한다. 다시 눈을 정면으로 돌리고 두 발바닥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 그날의 날씨는 변덕이 심했다. 딱히 더 갈 곳이 마뜩잖아 강가를 서성거렸다, 빠르게 꿈틀거리는 하늘의 먹구름을 보며 뼈만 남은 나뭇가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감상한다. 다리 위의 사람들은 건너 가거나 건너 오는 두 가지 방향으로만 움직이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도보엔 딱 두 가지의 방향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 목적이 없어 어정거리던 나는 유일한 관찰자였다. 바람이 잦아들고 이따금 햇빛이 나더니 쌀알만한 우박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폈지만 단지 몇 개의 동전으로 산 우산은 바람을 맞고 바로 뒤집어져 부서졌다. 뭔가 우습다는 기분과 약간의 해방감이 드는 동시에 날씨를 피해 차를 마시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면서 어정거리는 동안 아마도 바닥엔 내 발이 그린 몇 개의 엉킨 선이 똬리를 틀었을 것이다, 도보에 목적을 마련해 준 지금 나는 열심히 선으로 나아가고 있다. 눈 앞의 광경이 방금 전과는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보이던 것이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던 것이 표면 위로 떠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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