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 · 쾰른
라일락 빛이 도는 군청색 셔츠에 조끼를 단정하게 입은 노인이 무대를 가로지른다. 미소와 함께 묵례를 하고 곧장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는 그의 손엔 잔주름이 선연하고 핏줄은 셔츠 색만큼이나 푸르게 두드러진다. 큰 동작 없이 까닥거리기만 하는 손가락에서 변주에 변주를 거듭하는 음악이 흘러나와 귀에 닿는다. 노인은 자세를 거의 바꾸지 않는다, 피아노 앞에서 보냈을 그의 긴 세월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구부정한 등에 녹아있다, 찡그리거나 웃거나 표정의 변화 없이, 입은 가볍게 줄곧 닫혀있고 이따금 하얗게 센 눈썹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소리는 연주의 시작과 동시에 더함도 뺌도 없이 일관적으로 반복된다. 멜로디는 있지만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선명하지 않고, 박자의 변화도 음량의 변화도 미미하다, 기승전결이란 변화의 측면으로 듣자면 모든 변주가 소소하게 느껴진다. 잔잔하게 노래가 이어지던 와중에 오른손이 지키고 있던 건반을 떠나 잠시 뒤로 물러가더니 저음을 때린다. 잠시 빠른 템포로 연주된다, 다시금 오른손이 낮은 음을 누지르고 이번엔 소리가 작아진다, 하지만 이 모든 변화가 극적인 것은 아니다, 동일한 멜로디가 작은 변주들과 뒤섞여 곡 내내 반복된다. 다시 한번 낮은 음이 울리고 음계가 바뀌었다 돌아온다. 넓은 콘서트홀의 공기가 노인의 손가락 끝에 매달려 있다, 그 속에 노인은 홀로 연주를 이어나간다. 때때로 변화를 알리는 저음이 울리고, 손가락은 여전히 가볍게 까닥인다. 이따금 고조되는 부분도 있지만 감정이 폭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쌓아온 변주의 밀도가 높아진다고 하는 게 맞겠다. 어느새 연주의 시작과 닮은 소리가 흐르더니 오른손은 천천히 건반을 떠나 그의 허벅지에 앉고, 차례대로 왼손도 자리를 떠난다, 건반 가장 저편의 저음이 연주의 끝을 알린다, 언제부터인가 내 얼굴엔 울음이 묻어 나온다, 소리의 잔향이 가실 때쯤 노인은 체중을 실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윗글은 2015년 3월 7일 몬트리올에서 자신의 곡 『Mad Rush』를 연주하는 필립 글래스Philip Glass를 보고 쓴 것이다. 나는 이 연주를 처음 들었던 당시 8개월간 머물렀던 라이프치히의 하얀 집에 있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모니터를 통해 뭔가 보거나 읽거나 하며 보내고 있었고, 동시에 시간이 무엇이고 시간을 보내는 게 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을 의식하는 건 그때 내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는데, 시간이 존재한다면 그때의 나는 그걸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릴없이 읽고 듣는 생활이 이어지던 중 그의 연주를 동영상으로 보게 됐다, 2015년의 그는 내가 알고 있던 이미지에 비해 완연히 황혼에 접어든 노인의 모습이었고, 그게 다소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를 그저 인터넷에 존재하는 몇몇 사진만 보고 역사 속 인물 한 명쯤으로 박제해버렸던 것이다. 영상 속 그의 손은 민첩했지만 그는 느리게 움직였다, 마치 신체마다 다른 인격이 있는 것처럼. 그가 연주한 『Mad Rush』는 이름과 달리 서정적이고 (다른 형용사를 쓰고 싶은데 음악을 형용사를 빌어 서술해 본 적이 없는 탓이다.) 내면적인 분위기의 곡이다. 그래서 연주 영상은 마치 한 노인이 자신의 인생이 어떠했는지를 관중에게 조곤조곤 펼쳐 보이는 느낌이었다. 차고 넘치는 감정은 없다, 그냥 순간마다 변주가 끼어들며 엇비슷한 멜로디가 흐를 뿐이다.
나는 그때쯤 하루가 멀다고 연거푸 지쳤다가 다시 힘내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차이와 반복이 있다면 차이는 항상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 버려 없고 성긴 반복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 반복이 좀 깊이, 지겨웠다. 반복의 실타래를 너르게 펼쳐내 마디 지어줄 변곡점이 없었다. 순수한 좌절이나 오롯한 기쁨도 없었고, 더는 내가 어디에서 지쳤고 무엇을 기점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알아내고 싶지 않았다. 찾아낸다 한들 반복은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밀물처럼 나를 덮쳤다가 헤아릴 새 없이 썰물로 내 모든 것을 쓸어가기 일쑤였다. 새로운 시도 뒤에 기다리는 것은 이렇듯 한결같은 백사장의 모래성이니 언제부턴가 쌓기를 그만뒀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쓸려가기를 기다리는 모래성, 그 작은 둔덕이 세워지지 않는 것 정도겠다. 우리는 시간에 대하여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전히 토론하고 있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매 순간 지나가는 초침 소리를 들으며 사는 나는, 이유 없이 시간을 보내는 법을 잊어버린 상태였다.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을 문제 삼아본 적 없어도 매번 얼굴을 달리하는 시계는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어떤 미궁 같은 것이었다. 미궁이라기엔 생겨 먹은 모양새가 단순하기 그지없는데 그 누구도 탈출하지 못한 미로. 그러니 하루를 멜로디라 한다면, 급격한 사건 전개 없이 여러 엇비슷한 변주로 이어지는 그의 곡이 당시 내가 통과하던 시간과 닮았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으리라. 눈에서 울음이 새어 나온 건 이 노래가 이런 시간 감각을 그저 받아들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건 대부분의 반복과 가끔의 변주로 이냥 저냥 흘러가기 마련이라고. 아마 너는 앞으로도 빠진 힘을 다시 주어 모아야 하는 굴레를 되풀이하게 될 테니 긴장을 놓고 시간과 함께 잔잔히 흐르라고, 노인의 주름진 손이 그렇게 얘기했다.
작곡가 필립 글래스는 미니멀리즘 음악 사조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미니멀리즘은 빼기에 가깝다. 빼고 빼서 단출해진 소리를 레이어 삼아 반복과 변주를 통해 하나의 음악으로 쌓아 올린다. 변주의 단위가 되는 기본 소리는 개별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차이의 반복, 즉 음악적 변주가 쌓여서 완성된 노래 안에서 모든 관계는 유기적이다, 미니멀리즘은 단일한 음을 다루기보다 이것들이 어떻게 상호 연결되고 개별의 단순한 총합 이상으로 발전될 수 있는지에 집중한다. 이를 통해 소리들은 덧셈보단 곱셈으로 증폭된다. 그러니 미니멀리즘은 반복을 긍정한다, 반복을 긍정하는 것에 더해 그것에 숨겨진 차이의 레이어를 찾으라 요구한다. 그리하여 단순히 되풀이되는 것으로 보였던 반복은 더 이상 고정적이지 않게 된다, 반복 자체가 결국 차이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반복을 구성하는 건 되풀이되는 차이이다. 창문을 적셨던 어제의 비가 오늘도 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빗방울과 빗방울은 전혀 다른 허공을 관통해 다른 시점으로 세상을 내려다봤을 것이다. 모든 빗방울은 하늘에서 땅에 닿기까지 서로 다른 경로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동일한 그들의 외관엔 차이가 서려 있다. 소리의 경우 그것이 존재하려면 매질이, 음악은 매질과 더불어 청자가 필요하다. 따라서 하나의 노래가 동일한 연주를 담보하기 위해선 적어도 동일한 매질과 청자가 필요한데, 이러한 조건은 동일성이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증거와 같다. 동일한 악보가 동일한 방법(과연 방법적 동일성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지는 차치하고서)으로 연주된다 하더라도 그 소리가 타고 넘어가는 매질이 다를 것이며 청자도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동일성의 반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까닥이는 손가락의 움직임도 매번 다른 까닥임이다, 그렇기에 그의 노래는 동일성의 이름으로 무시해왔던 차이의 반복을 알아차리라고 내게 호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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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성은 나에게 시간 감각을 바탕으로 주로 시각에 의존하는 개념이다. 나는 시간 간격을 고려해 두 개 이상의 세상이 서로 같아 보일 때 동일성을 감지한다. 틀린 그림 찾기는 두 칸으로 구성된 동일한 그림에, 그 속에 숨겨진 작은 차이 조각을 찾아내는 게임이다. 이 게임은 그 간단한 규칙만큼이나 단순한 인식적 판단만 할 수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게임 참여자는 같은 그림은 같아 ‘보여서’ 같고, 틀린 그림은 단지 틀리게 ‘보여서’ 틀리다고 여길 수 있으면 된다. 따라서 ‘보이는’ 것의 양태를 의심하는 사람은 이 게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게임을 시작하면 눈동자는 같은 그림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반면에, 틀린 그림 위에선 오래 머무른다. 여기서 차이는 중요성, 즉 의미를 획득하지만 같은 것은 그럴 수 없기에 배경으로 전락하고 만다. 동일한 것으로써 배경은 차이를 위해 존재하는 동시에 차이를 쉽게 드러내지 않기 위한 시각적 교란을 가하는 장소다. 차이는 눈에 띄기 때문에 의미를 획득하지만 동일한 것은 의미를 잃는다. 이러한 판단은 현실에서도 벌어진다. 우리는 시시각각 눈 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그림을 과거의 그림, 즉 기억과 비교하며 새롭게 주어진 정보가 얼마나 다른 것인지, 또는 낯선 것인지 판단한다. 판단이 내려질 동안 동일하다고 판정된 것은 빠르게 배경의 자리로 물러난다. 이 과정에서 차이는 배경으로부터 떨어져 독립성을 획득하고, 원래 배경이 가져다주던 맥락에서 탈락한다. 차이에게 배경은 흰 백지나 다름없고, 이로써 차이는 배경을 통해 재 맥락 지어질 가능성에서 이탈한다. 시간 감각과 시각에 의지하는 이러한 동일성 판단은 인간 사고방식의 많은 부분을 형성한다. 하얀 것은 하얗고 검은 것은 검고 노란 것은 노랗다고 여겨진다. 이 색깔들의 눈에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동안 그것들이 위치했을 수많은 배경들을 지워버리고 단지 하얀 것, 검은 것, 노란 것이라 그들을 명명한다. 새로운 단어는 노랗기도 하면서 다르기도 한 것을 자신의 영역으로 포섭하면서 자신의 의미망을 굳건히 한다. 이제 노랗기도 한 다양한 것은 단지 노란 것으로 불린다.
나에게 동일함은 썩 시각적인 판단이다. 그래서 동일하게 ‘보이는’ 그림 밑에 숨겨진 다른 감각 단서들을 알지 못한 채로도 현상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수월히 믿는다. 그리고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뭐, 똑같네.’ 만일 시각이 존재하지 않는 감각일지라도 인류는 아마 다른 감각을 앞세워 마찬가지로 동일함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동일함은 중요한 개념이다. 규칙과 통일성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 주고 나아가 신뢰감과 안정감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향해 동일하다고 설명하는 순간, 실상은 다를 수 있음에도 동일할 가능성이 막연히 생겨나고, 막연한 가능성은 믿음으로 번져나가, 마침내 그것은 동일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신뢰감과 안정감의 발달과 상관없이 이러한 것은 우리의 인지력을 뭉뚝하게 만든다. 동일하다는 표현은 동시에 동일하지 않은 그 무언가를 가린다. 동일함은 동일하지 않을 가능성을 그 자신의 의미에 내포하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동일함은 믿음만큼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 동일하게 보이거나 혹은 동일하게 여겨지는 느낌은 단지 우리 감각에 달려있다. 뭔가를 향해 ‘같다’고 서술하는 것은 대상을 더 열심히 느끼지 않은 것에 대한 증거일 수 있으며, 따라서 ‘같다’고 발음하는 것은 그 단어가 뱉어지기 이전에 잠재했을 수많은 차이의 가능성을 단번에 종결시키는 위험을 갖는다.
감각을 통해 얻은 인상이나 판단은 수정될 여지 없이 고착되기도 하는데 이를 개인이 무엇을 ‘믿는다’고 표현해 보자. 이때 믿음은 여전히 개인의 실천 속에 존재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의 실천에 대한 요구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재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판타지’라고 정의한다. 판타지는 개인의 믿음 여부와 상관없이 독립된 관념으로 이미 존재하리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판타지는 게으른 인식에서 태어나고 강화된다. 이에 따르면 동일성은 내게 하나의 판타지였다. 내가 시간이 똑같다고만 느꼈던 이유는 반복을 받치고 있는 차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세계관은 생략을 통해 구성된 것이기도 하기에 적당한 무지가 없었더라면 분류와 분석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알지 못함에서 계통이라는 줄기가 자라나 일반성이 피어난다, 일반성에 기대어 우리는 단어라는 붉은 열매를 얻었고, 편리한 도구를 가진 대신 인식의 한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같은 뿌리에서 판타지도 자라난다. 판타지는 고정적이다, 판타지는 명명과 동시에 탄생하고, 세계관의 업데이트는 그 즉시 완료된다, 판타지엔 딜레이가 없다, 그곳엔 변화도 없고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이 어떠하리라.’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다. 그래서 판타지의 세계는 어제와 같이 오늘도 안전하고 안락하다, 예측하고 그 예측이 항상 적중하리라 믿는 것만큼 초현실적인 게 없지만 아무렴, 그 세계에 대한 정의와 신뢰를 철회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실현될 수 없다는 전제가 판타지의 핵심이기에 온전한 개념으로써 판타지는 영원히 존재한다, 영원히 미뤄지는 구현은 그렇게 영원한 믿음을 가능케 한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판타지를 현실 세계 곳곳으로 가지고 내려온다는 점이다. 내가 그러했듯 마치 동일한 시간이 반복될 뿐이라는 믿음과 느낌, 커져만 가는 권태감, 동일함이라는 환상의 이면을 캐볼 생각을 못 했던 무지는 판타지가 내 두 눈을 가리고 있도록 내버려 두는 동안 자라났다. 차이에 개념적인 대립 쌍을 지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판타지일 것이다.
그리고 판타지는 대충 쓰인 언어의 탈을 쓰고 우리를 엄습한다.
별안간 대충 구사된 명사, 형용사, 동사, 부사, 감탄사 ….
그런데 반복과 차이는 어디서 경계 지어지는가? 앞서 반복은 차이의 반복으로 구성된다 했지만 그렇다면 과연 차이가 얼마나 반복되어야 우리는 이를 반복이라 여기는가? 이를 판가름 하기 전에 언어를 얘기하고 싶다. 언어를 통해 생각하는 인간의 사고력은 불가피하게도 언어에 발을 묶이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우리의 사고도 반복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단어는 반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과학에서 하나의 주장이 법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려면 실험을 통해 동일한 결과를 다시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한다. 즉 반복될 수 있어야 법칙이 되고, 그래야 그 법칙에 이름이 주어진다. 언어는 이와 달리 자의적이고 사회적인 약속의 산물이지만 이 역시도 되풀이되는 상황이나 대상을 설명하기 위한 욕구에 기반한다. 매일같이 보는 얼굴에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언급을 포기하거나 이름을 주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사전에 수록된 모든 단어는 그것이 미래에 또 등장하리라는 것을 가정한다. 오늘 먹은 사과를 내일도 먹을 것이다. 이 사과가 엄연히 그 사과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모든 사과는 사과다. 만일 빨간 사과가 아닌 초록 사과가 등장한다면 이는 차이가 등장한 셈이고 그러면 ‘빨간 사과’, ‘초록 사과’와 같은 방식으로 이름의 분화가 이뤄진다. 즉 반복과 차이 모두가 언어 형성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한 번 반복과 차이 그 어디선가 안정적인 균형점이 고착화되면 되돌아가긴 어려워 보인다, 그것은 언어를 아예 무산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여기에서 내가 차이와 반복을 규정하긴 불가능하다, 나는 언어로 사고하고 이 언어에는 이미 이 언어만의 차이와 반복의 규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경계 어딘가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구사하는 언어가 보여주는 신기루일 수 있다. 정리하면 언어는 반복되는 것에 이름을 붙여주면서 형성된 법칙의 총체이며 따라서 일반화 그 자체다. 아무리 작은 차이에 이름을 주었다고 해도 그 또한 일반화에 지나지 않는다. 단어는 그 단어로 지칭되는 대상들 모두가 공유하는 동일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동일성 인식 없이는 언어의 성립은 애초에 불가능하며, 이 글 또한 쓰일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니 마치 이 글을 쓰고 있는, 즉 언어 활동을 하는 내가 마치 판타지 게임을 하는 것 같다. 게으른 인식으로 동일성의 판타지에 빠져선 안 된다고 주장하던 글이 끝에 와선 언어 그 자체가 판타지를 구축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하는 격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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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을 본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나는 쾰른으로 거처를 옮겼고 벌써 일 년 가까이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 많은 변화가 있은 동시에 여전히 많은 게 동일하다. 혼자 살았지만 꾸준히 안부를 묻고 같이 식사하던 이웃이 있었고, 하우스 메이트와 함께 살고 있지만 눈을 마주치는 일은 일주일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지갑 속의 카드는 한 장 뿐이었고, 신분과 소속을 밝히는 신분증과 다른 몇 개의 카드가 더해져 지갑이 두껍다. 5분 이내에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공원에 갈 수 있었고, 초록색만을 보기 위해선 꽤 긴 거리를 걸어야 한다. 내 것이 아닌 것으로 꾸려진 집에 살았고, 내가 구매한 많은 것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건너 집 창문 안으로 보이는 노부부의 하루와 그 윗집 베란다의 정원 그리고 다시 그 윗집 남자의 담배 피우는 모습을 자주 구경했었고, 베란다 너머 커다란 나무와 그 아래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토끼를 구경한다. 외출하는 가장 빈번한 목적은 마트에 가는 것이었고, 마트에 가는 것이다.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은 모두 낯선 얼굴을 하고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지나갔고, 낯선 얼굴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지나간다. 아침에 눈을 떠 갓 느끼는 기분은 항상 영문 없음의 상태였고, 영문 없음의 상태다. 시간은 지나갔고, 시간은 지나간다. 나는 나로서 생각했고, 나로서 생각한다. 지금은 예전만큼 시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 이 사회의 방식으로 시간을 학습했기에 시간이 지나간다는 표현도 그러한 감각도 수긍한다. 그렇지만 크고 작은 차이와 반복이 시간을 직조하는 베틀이란 점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이 베틀은 지금도 나라는 피륙을 짜고 있다. 언제까지 이 집에 살지는 모르겠다. 언제고 왼손이 낮은 건반을 누를 테지, 가깝거나 먼 미래 언젠가 다시 이사할 것이다, 그때마다 낮은 소리가 울리고 저음 사이엔 차이의 변주가 사슬처럼 이어질 것이다. 나는 나로서 생각하며, 여전히 시간은 지나가고, 아침에 눈을 떠서 나를 반기는 기분은 영문 없음의 상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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